그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고구려 모본왕(48~53) 2년인 서기 49년에 중국의 심장부로 한(漢)나라의 수도인 낙양(洛陽) 북쪽에 있는 태원(太原)을 비롯한 상곡ㆍ어양ㆍ북평 등을 점령하였었다는 것,
4세기 전후에는 요녕성 서남부 및 북경ㆍ하북성 동부지역에 있던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 요동군 등을 점령하였고, 494년에는 하북성 북부, 요하 상류유역, 그 북쪽의 내몽고, 동몽고, 동부 시베리아 지역을 영토로 한 부여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최대 강국이 되었다는 것,
등을 김종서 박사가 객관적, 실증적,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위만조선,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 등의 한사군이 4세기 초까지 한반도 북부를 지배해왔다는 일제식민사학자, 조선총독부사학자, 그들의 추종자들이 한국고대사 분야를 대부분 장악하고 있다. 때문에 서기 22년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흡수 통합하였고, 호동왕자의 계략으로 평양ㆍ평안도 지역에 있던 낙랑공주의 낙랑국을 흡수 통합하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부정되고, 서기 49년 모본왕이 중국 후한의 심장부인 태원 등을 점령하였다는 후한의 역사서인 『후한서』의 기록도, 서기 55년에 태조대왕(53~146) 때에 이미 요하의 서쪽을 영토로 하여 요하의 서쪽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입을 방비할 만큼 고구려의 영토가 광대하였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부정된다. 한반도에 한사군이 4세기 초까지 있었다는 그들의 역사인식으로는 건국 초기의 고구려가 그러한 광활한 지역을 영토로 한 강대국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종서 박사의 연구서인 『단군조선영토 연구』『기자ㆍ위만조선연구』『한사군의 실제 위치 연구』『부여ㆍ고구려ㆍ백제사 연구』 참조. |